시작법

끊임 없이 펌프질 해라

앵두님 2017. 7. 10. 11:56



끊임없이 펌프질을 해라

 

 

   펌프질을 안하고 반나절만 그냥 놔두면 펌프속의 물은 다시 땅속으로 잦아든다. 그럴 땐 한바가지 마중물을 붓고 다시 열심히 펌프질을 해야 한다. 처음엔 탁한 물이 나오다가 나중에 차고 맑은 물이 나오기 시작 한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펌프질을 안하면 뻔한 내용의 글을 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상이 떠오르면 계속 파고 들어가야 한다.

  일전에 시창작 강의를 한번 한 적이 있다. 5팀으로 나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게임을 해보았다. “당신에게 소포가 배달되었습니다. 도장을 찍지 않으면 배달된 소포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장은 있고 인주가 없네요! 인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3분 동안 최대한 써보시기 바랍니다”

  3분 동안 대략 각 팀마다 30개 정도 인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써냈다. 하여, 각 팀마다 처음 생각한 것 5가지를 불러보라고 했다.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물감, 피, 흙, 봉숭아꽃, 김칫국물....뭐 이런 식이었다.

  그럼 제일 끝에 나온 5가지를 불러보라고 했다. 대답이 가관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들이 나왔다.

  제가 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처음 생각한 5가지는 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내가 생각한 것을 남도 똑같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뻔한 시가 된다는 말이다. 결국 시가 되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상상을 초월하는 가장 밑의 것을 끄집어 낼 때 가능한 것이다. 펌프질을 하면 처음엔 흙탕물이 나온다. 하지만 계속 펌프질을 하면 차고 맑은 물이 나온 것과 동일하다. 상투성을 벗는 것이 시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꽃눈이 번져 - 고영민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누군가 이 시간, 눈 빠알갛게

나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나를 흔들어 깨운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눈 부비고 일어나 차분히 옷 챙겨 입고

나도 잠깐, 어제의 그대에게 멀리 다니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다녀올 동안의 설렘으로 잠 못 이루고

소식을 가져올 나를 위해

돌을 괸 채

뭉툭한 내가 나를 한없이 기다려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순간, 비 쏟아지는 소리

깜박 잠이 들 때면

밤은 더 어둡고 깊어져

당신이 그제서야

무른 나를 순순히 놓아줬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도 지극한 잠속에 고이어 자박자박 숨어든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에게 다녀간 내가

사뭇 간소하게 한 소식을 들고 와

눈 씻고 가만히 몸을 누이는

이 어두워

환한 밤에는